지구의 지붕 히말라야
총길이 2,400km. 히말라야는 고대 산스크리트(梵語)의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2개 낱말이 결합된 복합어이다.
처음에는 갠지스강(江) 연변의 수원(水源)지대를 가리키는 좁은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넓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히말라야산맥은 북서쪽에서 남동 방향으로 활 모양을 그리며 뻗어내리면서 몇 갈래의 산계로 나누어진다.
맨 앞쪽의 힌두스탄 평원에 면하면서 비교적 낮은 시왈리크산맥과 그 뒤쪽에 있는 소(小)히말라야산맥, 산맥의 주축에 해당하는 대(大)히말라야산맥의 3개의 산계로 나눌 수 있다.
대히말라야산맥에는 세계의 거의 모든 최고봉이 솟아 있으나, 줄곧 연속되지는 않고 거대한 산괴를 이루면서 군데군데 깊은 계곡으로 단절되어 있다.
이 가운데 카라코람산맥을 히말라야산맥과 구분하여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함께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히말라야산맥은 ‘눈의 거처’라는 뜻에 어긋나지 않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삼히말라야〉
히말라야의 가장 동쪽에 치우친 구역으로 브라마푸트라강(江)이 크게 굴곡을 이룬 지점으로부터 부탄의 동쪽 경계까지를 가리킨다.
인도에서 티베트 국경지대까지 열대성 수림이 우거져 있고 몬순이 몰고오는 많은 비를 정면으로 받기 때문에 아직도 탐사되지 않은 지역이 많다. 남차바르와(7,756m) ·걀라페리(7,150m) 등 새로 발견된 산도 많다.
〈부탄히말라야〉
부탄 영토 내에 포함된 부분을 말한다. 7,000m급 봉우리가 몇 개 알려져 있으나 초모라리(7,314m)가 등반된 정도이고, 입국이 어려운 사정 등도 있어 답사되지 않은 곳이 많다.
〈시킴히말라야〉
히말라야 구분 중에서 가장 좁은 부분으로 부탄과 네팔 사이에 있다. 예로부터 춤비 계곡을 따라 티베트로 가는 통로였기 때문에 히말라야 중에서도 가장 일찍 알려진 곳이다.
칸첸중가산(8,603m) 이외에 자누산(7,710m) ·시니올추산(6,887m) 등의 매우 개성적인 모양의 산들이 솟아 있다. 부탄히말라야까지 합하여 시킴히말라야라고도 한다.
〈네팔히말라야〉
네팔 영토 내에 있는 부분을 가리키는데, 전체 히말라야산맥의 1/3을 차지한다.
에베레스트산(8,848m) ·로체산(8,516m) ·마칼루산(8,463m) · 다울라기리산(8,172m) ·초오유산(8,201m) ·마나슬루(8,163m) · 안나푸르나산(8,091m) 등 8,000m급 봉우리 7개가 솟아 있다.
등산가들의 좋은 공격 대상이었으나 오랫동안 네팔의 쇄국정책 때문에 근접하지 못하다가, 1949년 네팔이 문호를 개방하자 히말라야 등산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가르왈히말라야>
네팔 서부 국경인 칼리강(江)에서 인더스강의 지류인 수틀레지강(江) 사이를 가리키며, 대히말라야산맥의 북쪽을 달리는 자스카르산맥이 티베트와 인도 국경을 형성한다. 최고봉은 난다데비산(7,817m)이다.
〈펀자브히말라야〉
서(西)인더스강과 동쪽의 수틀레지강 사이, 거의 네모꼴을 이룬 지역으로 8,000m급 봉우리는 낭가파르바트산(8,125m)뿐이다.
파키스탄 ·인도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입국이 곤란한 지역이다.
〈카라코람〉
카라코룸(Karakorum)이라고도 한다. 히말라야산맥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달리는 산맥으로, 히말라야산맥과 별도로 다루는 경우도 있다. 카라코람이라는 명칭은 주맥(主脈)보다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카라코람 고개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검은 자갈’을 뜻한다.
세계 제2위의 높은 봉우리인 K2봉을 비롯한 4개의 8,000m급 봉우리, 시아첸(72km) ·발토로(58km) ·비아포(59 km) ·히스파르(61km) · 바투라(58 km)의 5개의 대빙하를 안고 있으며, 첨봉이 이루는 장관은 네팔히말라야에 뒤지지 않는다.
히말라야산맥이 형성된 것은 지질적으로 보아 최근의 일인데, 제3기부터 조산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히말라야가 융기하게 된 원인의 하나는 산지에서의 빙하 ·하천의 격렬한 침식으로 하중(荷重:산지 내의 물질)이 제거됨에 따라 지각이 보상적(補償的) 회복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의 해발고도는 티베트의 해발고도보다 1,000m 이상 높다). 히말라야의 활발한 융기 현상은 특히 동부지역에서 지진이 잦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알 수 있다.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산맥을 횡단하는 협곡을 살펴보면, 브라마푸트라강이나 인더스강과 그 지류 수틀레지강, 혹은 에베레스트 동쪽의 아룬강 등 수많은 크고작은 하천이 히말라야에서 아득히 먼 북쪽에 수원(水源)을 두고 있는 데다 이들 지역이 히말라야보다 고도가 낮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추측컨대 현재의 수로가 형성된 뒤 중류지역에 해당하는 대히말라야산맥이 서서히 융기하기 시작하였고, 여러 하천은 하각작용(下刻作用)을 계속하여 톱니로 새긴 듯한 깊은 협곡을 만들어, 이른바 선행하곡(先行河谷)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하곡의 원류(源流)에는 빙하곡이 발달해 있으며, 카르(圈谷)에서 흘러내린 빙하는 중류에서 심한 U자곡을 만들고 하류에서는 빙퇴석의 구릉이나 하성단구(河成段丘)를 형성하고 있다.
이 빙하는 히말라야의 고봉을 오르는 데 좋은 루트를 제공하지만 표면에는 크레바스라고 불리는 균열이 종횡으로 뻗어 있고 빙탑(氷塔)이나 빙폭(氷瀑)이 등반자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빙하는 보통 설선(雪線) 이하까지 흘러내리는데, 카라코람 지역을 제외하면 크고 긴 빙하는 적고 대부분 30 km를 넘지 않는다.
히말라야의 지질은 3∼4개의 지질대(帶)로 구분할 수 있으나 지형의 구분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대히말라야의 북반부는 캄브리아기(紀)∼오르도비스기(紀)의 화석을 가지고 있는 해성층(海成層), 규암(珪岩) ·셰일(頁岩)이나 석회암을 포함하고 있으며 변성도(變成度)가 낮을 뿐 아니라 고도도 어느 정도 낮다.
한편 고(高)히말라야대(帶)라고 하는 대히말라야 남부는 북반부보다 변성도가 높으나 시대적으로는 비슷하며, 북쪽으로 기울어진 역단층(逆斷層)으로 소(小)히말라야와 경계를 이룬다.
소히말라야대(帶)는 고도의 변성작용(특히 상위층)을 받은 여러 종류의 변성암으로 구성되었다는 데에 지질적 특이성이 있으며 캄브리아기 후기부터 고생대 고기(古期)의 편마암, 혼성암이나 규암 ·대리석 등을 볼 수 있다.
약 100만 년 전(제3기 말)에 최종적인 변성작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때부터 히말라야의 조산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으로 기울어진 역단층에 의하여 잘려나간 내부의 지질구조가 복잡하여 아직까지 충분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히말라야의 맨 앞쪽에 해당하는 시왈리크 구릉지대는 제3기의 퇴적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상부의 역질(礫質)은 히말라야의 조산성(造山性) 융기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히말라야 조산운동은 습곡변형(褶曲變形)이나 북쪽으로부터의 상충작용(上衝作用)을 받아 갠지스 충적지 밑으로 빠지게 되었다.
대륙이동설에 따르면, 히말라야산맥은 예전에 남반구에 있었던 곤드와나 대륙이 북쪽으로 분리 ·이동할 당시 북쪽에 있었던 앙가라 대륙과의 사이에서 압축되어 오늘날과 같이 험준하고 복잡한 습곡산맥으로 융기한 것으로 보인다.
히말라야의 기후를 가장 크게 지배하는 요소는 여름과 겨울의 몬순이다. 여름철에는 대륙의 내부가 저기압권을 형성하기 때문에
이 기단이 히말라야산맥의 전면에서 강제적 상승작용을 일으켜 심한 강우(곳에 따라 국지적인 호우나 눈보라를 몰고 온다)의 원인이 된다. 특히 여름철 반년 중 전반기는 우기에 해당하고 겨울철에는 건조하다.
여름 몬순은 동부에서는 6월 초순에, 서부 히말라야에서는 약간 늦게 시작되며 펀자브에서 카라코람에 걸친 지역에서는 7월 상순경에 시작된다.
히말라야 등반은 이 몬순이 불기 이전(프레 몬순)의 2~3주 동안 기후가 좋을 때를 이용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몬순이 끝난 뒤(포스트 몬순)를 이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겨울 반년 동안에는 대륙 쪽이 고기압지대가 되는 데다 편서풍까지 남하하여 저온 ·강풍이 히말라야를 휩싸기 때문이다.
고도에 따른 기온저하율은 100m 오를 때마다 약 0.5℃ 안팎으로, 해발고도 8,000m 지점의 연평균 기온은 -20℃ 내외이다. 산지 사면(斜面)의 방향에 따른 일조량(日照量)의 차이도, 동 ·식물의 분포는 물론, 작물 ·토지이용 등 전반적 생활조건에 대한 제약 요인으로 작용한다.
자연적 식생을 살펴보면,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은 열대성이지만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온대 ·냉온대 식생으로 바뀌고, 4,000m 이상에서는 한대성으로 변한다.
네팔히말라야에서는 1,000m 지점까지 사라수(沙羅樹) · 등나무 ·판다누스가 무성한 열대∼아열대성 식생을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 2,500m까지의 온대지역에는 밤나무 ·떡갈나무 · 녹나무 등의 상록활엽수가 자라며, 안개가 심하기 때문에 나무 위에서 양치류 등의 착생식물을 볼 수 있고, 목련이나 석남 등이 핀다.
3,000m까지의 냉온대에는 솔송나무 등의 침엽수가, 그 위쪽 4,000m 지점까지의 아한대에서는 자작나무 ·젓나무가 보인다.
히말라야의 석남 군생지대는 3,000m 안팎의 고지대인데, 적 ·황 ·백 등 가지각색의 크고작은 꽃이 핀다.
산림(수목)한계는 대체로 4,000m로, 이보다 높은 한대에는 앵초 등속과 아네모네가 만발해 있는 꽃밭이 전개된다.
설선(5,200m 전후, 동부히말라야에서는 낮고 서부에서는 높아진다)의 위쪽은 빙설지대(氷雪地帶)이다.
거대하고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는 히말라야산맥에는 힌두계(系) · 티베트계 ·이슬람계 주민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저마다 고유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어 특이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특히 네팔 지역에서는 해발고도 2,000m선을 기준으로 그보다 높은 곳에서는 목축의 비중이 높은 티베트인(人)들이 흑우(黑牛) ·야크 ·들소 등을 사육하고 보리 ·밀 ·메밀을 가꾼다.
그보다 낮은 곳은 쌀 ·옥수수 등을 재배하는 힌두계 주민의 생활터전인데 경작에는 소를 사용하고 젖짜기용 물소를 사육한다.
농경의 상한(上限)은 주(主)능선 이북이 평균 3,600m이지만, 때로는 4,000m까지 올라가며, 가파른 산중턱에는 계단식의 경작지가 이루어져 있다.
대히말라야산맥을 종단하는 협곡 연변의 도로는 험난하고 가축도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기 때문에 교역 ·순례 등의 경우를 제외하면 교통은 활발하지 못하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 정세로 말미암아 예부터 다질링∼걍체 및 캄파종 간, 심라∼가르록, 길기트∼파미르 간을 잇는 길이 유명하였다.
영국 식민지시대에는 용맹스럽기로 이름난 네팔의 구르카족(族)이 영국의 용병으로 고용되었고, 1920년대에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인부로 채용된 네팔 주민 셰르파는 지금도 히말라야 지방을 여행하거나 등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히말라야에 관한 지식이 처음으로 유럽에 알려진 것은 히말라야에 접근한 데서 비롯된다.
BC 139년에는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사절이 된 장건(張騫)이 파미르를 넘어 아프가니스탄까지 들어갔다. 그 후 법현(法顯)·송운(宋雲)·현장(玄奘) 등의 승려들이 불전을 구하기 위하여 히말라야의 험로를 넘어 인도를 방문, 새로운 지식을 가져왔다.
안토니오 데 안도라데 신부와 일행 2명으로, 1624년 가르왈히말라야의 마나 고개(5,600m)를 넘어 티베트로 향하였다. 같은 무렵에 2명의 예수회 수사가 아삼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로 들어갔다.
1715년에는 이탈리아의 신부 이폴리토 데시데리가 카라코람을 거쳐 티베트를 횡단, 라싸[拉薩]를 방문하였다. 1774년 조지 보글은 동인도회사로부터 티베트의 시가체로 파견되었고, 1783년에는 새뮤얼 터너가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19세기가 되자 마침내 인도 측량국의 영국인 측량관이나 현지 고용인들에 의한 조사가 빈번해져 히말라야의 탐험이 본격화되었다.
1840년대에 영국의 스트레이치와 커닝엄에 의해 티베트 국경지역의 탐사가 있은 후, 1848∼1850년 식물학자 후커가 네팔 동부와 시킴 지방을 조사하였다.
1855∼1858년에는 독일의 슐라긴트바이트 삼형제가 시험삼아 가르왈히말라야의 아비가민을 약 6,800m까지 오름으로써 당시의 신기록을 세웠다.
1860년에는 인도 측량국 현지인이 펀자브히말라야의 시루라(6,500m) 정상에 오른 기록이 있다. 1866년 고드윈 오스턴이 카라코람의 발토로 빙하지역을 탐험하였다.
1865년 이후 약 20년 동안, 인도 측량국은 현지인 측량관(펀디트)을 티베트 남부로 진입시켜 지도 제작에 종사하게 하면서 티베트의 내부 사정도 비밀리에 조사하도록 하였다.
후자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인도의 티베트 학자 사라트, 찬드라, 다스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가 히말라야 탐험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람들이다.
근대적 히말라야 등반의 여명은 1883년 그레이엄에 의한 두나기리 시험 등반, 시킴의 카브루 주변 등반에서 시작되었다.
1887년 영허즈번드가 북쪽에서 무즈타그 고개를 거쳐 카라코람을 넘는 데 성공하였고, 1892년에는 카라코람 원정에 나선 콘웨이가 6,888m까지 올라가 당시의 신기록을 세웠다.
1895년 낭가파르바트산(8,125m)에 도전한 A.F.머머리는 조난을 당하였고, 1899년 프레시필드에 의한 칸첸중가산 정찰과 일주 여행으로 19세기 히말라야 등반사는 끝났다.
20세기에 들어서자 1907년에 가르왈히말라야의 트리술(7,120m)이 론스탭에 의하여 처음으로 정복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7,000m에 올라선 최초의 기록이었다.
다시 영국의 케라스는 1911년 7,000m인 파운프리에 올랐다. 1909년 이탈리아의 아브루치공(公)이 이끄는 대규모 원정대가 카라코람으로 들어가 K2봉 등정에 실패한 후, 초고리자에 도전, 7,500m 근처까지 올라가 기록을 경신하였다.
1899~1912년 미국의 워크맨 내외가 7차례에 걸쳐 카라코람 주변을 탐색하였는데, 워크맨 부인은 1906년 눈쿤 산군(山群)의 피나클피크(6,930m)에 처음으로 올라 여성 등반의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7,000m급은 불과 3개밖에 정복하지 못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된 히말라야 등반은 대전이 끝나자 다시 활발해졌다. 1921년 영국은 최초의 에베레스트 정찰대를 파견한 이래, 1938년까지 모두 7회 도전하여 1933년에는 약 8,572m까지 도달하였다.
칸첸중가산은 1929년과 1931년에 독일 등반대가, K2봉은 1938년과 1939년에 미국 등반대가 8,000m 부근까지 올랐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낭가파르바트산은 1932~1939년에 5차례에 걸쳐 독일·오스트리아 등산대가 도전하였으나 희생자만 냈을 뿐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6년 히든피크(8,068m)를 겨냥하였던 프랑스 등반대도 도전에 실패함으로써 8,000m봉은 하나도 등반하지 못했다.
한편 7,000m급에서는 1931년에 영국 등반대가 카메트에, 1936년에 틸만 등반대가 난다데비산에 올라 활기를 띠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중단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때까지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해 왔던 네팔이 문호를 개방하게 되자, 1950년 네팔로 들어간 프랑스 등반대는 단 한 차례의 도전으로 안나푸르나산을 정복, 인류 최초로 8,000m급 등반에 성공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1953년에 세계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이 영국 등반대에 의해 마침내 함락되었고, 같은 해 낭가파르바트산도 독일·오스트리아대(隊)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하나도 오르지 못했던 16개의 8,000m봉이 차례로 정복되어, 1964년에는 티베트의 고사인탄산(8,013m)마저 중국 등반대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이로써 히말라야의 신비시대는 사라지고 100개가 넘는 7,000m봉도 오를 만한 것은 모두 정복되어 새로운 처녀봉은 지도에서 찾기 어렵게 되었다.
한국의 등반대도 1995년 7월 브로드봉(8,047m)을 정복함으로써 8,000m급 중 14개 봉우리를 정복하였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루트 개척, 특히 카라비너·하켄·아이젠 등을 사용하는 인공 등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또한 스키를 이용한 오락·스포츠화, 산기슭을 걷는 트레킹과 같은 관광화로 대중화되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 여기저기서 히말라야에 관한 자료와 사진들을 모아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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